구독자 님, 오늘도 잘 보내고 계시지요? 뜬금없이 웬 사랑 타령이냐, 하시겠구나 싶기도 한데,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행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야기, 사랑 이야기요. 그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요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마침 이런 글을 발견했거든요.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발견한 글이요.
영혼의 약속
나는 고통의 깊은 구렁을 지나왔어요.
그러나 청소년 때부터의
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사랑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지나왔겠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루스벨트 고등학교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이
어떻게 자기의 일생을 나와 같은 남자와 함께 보내기로 선택을 했을까?
- 어빈 얄롬, 매릴린 얄롬의 《얄롬 박사 부부의 마지막 일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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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연애, 사랑이 시작되는 근본원리가 저 글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 시작의 근본 원리.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를 만나줄까?
그러니까. 내가 느끼기에 상대가 나한테는 벅찬 상대, 과분한 상대라고 느껴야 한다는 거에요. 저는 모든 사랑의 시작이 이와 같다고 생각해요.
"어찌, 저런 사람이, 어찌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나를 만나줄까?"하는 거요. 이게 없으면 사랑은, 깊은 사랑은 시작될 수 없어요. 나한테 벅찬 상대라고 느껴서, 나한테 과분한 상대하고 느껴서 감동하는 것. 이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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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서 과분한 상대라는 것은 아마 내가 (상대에게) 주는 것, 줄 수 있는 것 보다 내가 상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는 다 (받을 것 같다 또는 나한테 더 좋을 것 같다) 라는 뜻일거에요. 즉 "과분한 상대" 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유익한 상대인가?" 하는 말이겠지요.
물론 저도 사랑은 베푸는 것이고, 아껴주는 것이고, 책임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사랑이어야지 또 한편으로는 오래 지속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사랑이 시작되도록, 한 사람의 마음이 동하게 되는 기본 로직, 인간의 본성은 사랑에서도 동일하게 (그 다른 어떤 관계, 비즈니스와도 동일하게) 그것은 "내게 유익이 되는 가" 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어떤 분은 "너는 어찌도 사랑을 그렇게도 계산적으로 하려고 하느냐" 고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은 주는 것이야. 아주 예전부터 유치환 시인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그게 행복이라고 노래했건만. 너는 그것도 모르니?" 라고 하시면서요. 헌신적인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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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요, 글쎄요.. 헌신적인 사랑이 아름다울까요? 정말? 무조건적인 헌신은 시간이 지나면, 그 헌신적인 사람을 헌신짝으로 만들 뿐이라는 거 우리 다 경험으로 알지 않나요?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은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지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어요. 자신을 바로 세우지 않고는 절대 어떤 인간관계도 온전할 수 없지요.) 그러니 무조건적인 헌신적인 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인것이고, 이런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헌신적인 사람은 헌신짝이 되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그 헌신적인 사람이 헌신적이게 된 그 시작에도 분명, 저 "과분한 상대" 라는 로직이 반드시 있었을거에요. "과분한 상대"이기에 헌신적이기로 선택한것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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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사랑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내게 과분한 상대라고 느끼 것", 내게 유익이 되는가?"에서 그 유익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유익이라는 것은 그 사람 곁에 있으면 내가 정신적으로 행복한지 등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지요.
유익이라는 것이 경제적인 부분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만약 그렇다면 세상 어떤 제품과 서비스가 판매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현금이라는 재화를 제품과 서비스라는 무형 유형의 재화와 교환함으로서 시장 경제를 형성하고 있잖아요. 동일한 제품과 서비스에도 각자가 느끼는 가치는 다르기에, 아무도 손해보는 사람 없이 교환이 가능해지는 것이고요.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거에요.
내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물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또다른 형태의 것이든, 그것에 대하여 상대가 서로 매기는 가치가 다르기에 서로 과분한 상대라고 여기며, 서로 준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받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한 상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어찌되었든 우리는 타인에게 무언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공감하는 능력일 수도 있고, 넘치는 물질적 여유일수도 있고, 육체적인 헌신일수도 있고.
우리는 유익한 상대가 되어야 해요. 그게 우리를 외로움에서 해방시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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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저와 같이 갑사맘(갑자기 사별한 엄마들)들이 빛나는 4개의 별(일, 사랑, 가족, 건강)을 가슴속에 키워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 일거에요.
물론 당장의 연애와 사랑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쩌면 사별하신 분이라면 아마도 그대를 보내는 숲에서 어느 정도의 애도의 시간을 가질 거에요. 이건 그냥, 제가 해보니까.. 그렇게 되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 고인에 대한 예의.
하지만 절대 그 숲에서만 영원히 있을 수는 없어요.
내가 살아야 아이들을 키울 수 있잖아요. 내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거고요.
엄마가 행복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절대 행복할 수 없어요.
사람이. 사랑 없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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